기획의 글
다큐멘터리 장면 하나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도나 해러웨이가 시종일관 호쾌한 목소리로 지구에서 계속해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함께 짓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지구생존가이드”다. 예쁜 나바호족 바구니를 손에 든 미국인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이 이 사물을 차지한 것은 약간 부끄러운 일이라 말한다. 바구니에 담긴 역사 전체를 물려받지 않고 바구니만을 손에 넣은 정복자의 딸이므로. 이 이야기에서 바구니는 아메리카 이주민과 원주민의 관계에서 발생한 침략의 상징이자, 탄생의 이야기를 상실한 사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마치 사방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 미로에 빠진 것처럼, 사물의 소유를 통해 자신의 필요와 취향을 강화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강화하고, 사물은 탄생 이야기를 잃는다. 나르시시스트들과 망각에 빠진 사물들이라니. 오. 모두가 외로운 세상.
《쿨라 링: 이야기 군도》는 거울 미로에서 빠져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여정이다. 팩토리2와 오랜 시간 관계를 이어온 작가들과 두 명의 기획자, 팩토리 2의 사람들이 모여 실뜨기 놀이하듯 턴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면서 전시를 꾸렸다. 따로 또 같이 모여 숱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작가들에게서 몇 가지 공통적인 모티프가 드러났다. 우연한 만남과 채집, 타자와의 접촉, 균형과 공존의 상태,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의 유희. 이 키워드들은 외로운 세상을 빠져나가는 새로운 이야기의 재료가 될 수 있을까?
하나의 전시를 계기 삼아 만나 대화해 온 우리들의 관계에서 ‘쿨라(Kula)’라 불리는 오래된 관계가 떠올랐다. 쿨라는 뉴기니 남동부의 여러 섬 부족들 간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선물 교역이다. 두 가지의 조개장신구, 빨간 조개 목걸이와 흰 조개 팔찌가 쿨라를 통해 섬 사이를 돌고 돌면서 섬들 간에 필요한 물건들과 병행하여 교환된다. 뉴기니 부족들에게 쿨라는 삶의 필요한 것들을 아름다움 속에서 교환하는 의식적인 행사였다. 쿨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선물받은 조개 장신구를 잠시의 기쁨으로 간직하다가 다음번 교환에 다른 이에게 선물한다. 이들의 소유는 다음번에 누군가에게 주기 위함이다. 쿨라를 통해 그들은 사물의 공동 관리자이자 분배자가 되고, 조개 목걸이와 팔찌는 어떻게 제작되고 어떤 사람들에게 간직되고 자랑이 되어왔는가로 구성된 긴 이야기를 갖게 된다. 조개와 사람들과 섬들의 기억이 이 교환의 고리(Ring)에 따라붙는다. 이 쿨라의 고리에 다섯 명의 작가들의 이야기를 연결해 보자.
이야기는 빛과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수소는 오랜 시간을 들여 방법을 발견한 그림을 선보인다. 긴 휴지기를 거쳐 작업을 다시 시작하면서 작가는 1년간 몸에 붙은 조형의 기술을 비워내는 시간을 가졌다. 그 끝의 어느 날, 종이에 촛농을 떨어뜨리고 그 간격을 연필 선으로 이어보았다. 또 다른 어느 날 밤에는 종이의 뒷면에 연필 선을 거듭 채워 넣었다. 종이에 스며든 촛농이 빛에 반응하는 미디엄이 되어, 그림은 감상 시마다 빛과 중첩의 효과로 다른 모습을 내어준다. 아침에는 빛을 머금어 투명하고 어두운 자국이 되어 종이 뒷면의 연필 선을 중첩하여 내비치고, 밤에는 불투명한 하얀 촛농이 되어 앞면의 그림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보았다고 말하기 위해서 최소한 한 번의 아침과 한 번의 밤이 필요한 그림이다.
아사코 시로키는 여러 도시에서 위치를 옮겨가며 작업한다. <Follow your Sun>은 덴마크에서 머물며 수행한 작업이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을 기념하며, 작가는 책상 위에 빛이 떨어지는 자리에서 꽃병의 그림자를 따라 그린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책상에 맺힌 해 그림자의 위치도 조금씩 이동하고, 꽃의 그림자를 따라 그리는 선 또한 끝없이 옆으로 이동하며 변주한다. 빛과 그림자를 따라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해가 몇 시간 먼저 뜬 나라의 누군가를 상상한다. <Evergreen>은 작가의 가족 구성원의 기억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전쟁 후 한국과 일본에서 강인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작가는 한국과 일본의 소나무 에센셜 오일을 섞어 유리병에 담았다. 영혼의 무게만큼 담긴 오일은 한 사람의 삶을 담은 향기를 전시 공간에 채운다. 전시장 바닥의 은색 체인은 두 나라 사이 해안선의 형태로 늘어뜨려져 있다.
조성연은 정물 사진의 엄격한 규칙 속에 찰나의 풍경부터 하나의 계절, 식물의 전 생애까지 여러 단위의 시간을 담아왔다. 전시 공간 곳곳에 놓인 조성연의 사진들은 세상의 사소한 세부를 단서처럼 포착하고 있다. <우연한 때에 예기치 않았던>과 <사라지지 않고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두 개의 시리즈 작업 제목은 작가가 사진의 계기를 발견하고 조합하는 방식을 알려준다. 작가는 길을 걸으며 우연하게 마주친 별것 아닌 풍경을 예민하게 바라보면서 작은 변화의 계기가 발생하는 시간의 틈새를 채집해 정물 사진의 프레임 안에 배열한다. 채집된 이미지는 사물의 출처를 담은 신상명세가 되고, 채집된 사물은 때로 작가의 손을 거쳐 일시적인 균형의 상태에 도달한다. <불안정한 균형>의 사진 속 쌓인 돌들은 서로의 몸을 서로에게 빌려주고 빌리면서 공존의 상태를 이루어낸다.
최해리의 회화는 적극적인 유희와 해석의 시공간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그랜드 아무르 푸>는 19세기 문학사조부터 현대 영화에까지 이어져 온 문화적 유희의 개념인 ‘아무르 푸(Amour fou)’ 개념을 차용해 동서양 회화사의 규칙을 유희의 대상 삼아 그린 그림이다. 강렬한 사랑의 형태를 뜻하는 ‘아무르 푸’의 화면 속에서 테이블은 실내인지 실외인지 모를 경계에 놓여 스스로 움직여 자신을 향한 시각을 흔든다. 테이블 위 다양한 시점에서 포착된 사물들과 미묘하게 어긋난 수평선은 시각의 위계 관계를 질문에 부친다. 양 옆에 걸린 <엠브로이더리 툰>은 일정시간 지속한 큰 작업의 단위를 기념하는 작가의 리추얼의 산물로, 일정한 규칙 아래 작업의 전후에 모인 물질과 이미지, 글귀를 엮어 이야기를 전달한다. 꽃 자수, 관광지의 수브니어 이미지, 실재와 상상의 세계의 혼재를 표현한 문장을 일렬로 배열한 이 작품은 <그랜드 아무르 푸>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와 출구가 된다.
허정은은 이미지와 사물을 콜라주해 이야기를 짓는다. 작가의 작업실은 만물의 요람이다. 화집에서 발견한 그림들, 산책 중에 발견한 마른 식물들, 낡고 미스테리한 사물과 부품들이 그녀의 작업실로 모인다. 수술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처럼, 작가의 테이블 위에 오른 사물들은 알 수 없는 조합으로 결합된 입체 콜라주가 되어 전시 공간으로 출현한다. 한편, 작가가 길에서 발견한 버려진 나무 서랍, 어느 날 지인에게서 얻은 헤겔 미학원서는 근사한 이야기의 무대가 된다. 서랍을 연극 무대 삼고 미학 원서의 낱장을 지면 삼아 펼치는 작가의 이미지 꼴라주는 관객에게 무한하게 증식하는 이야기의 재료가 된다.
쿨라의 교환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즉각적인 거래가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려 도착하는 선물의 형태를 띤다는 데 있다. 상대가 주는 것과 내가 받은 것, 내가 준 것과 상대가 받은 것이 완벽한 등가를 이루는지 판단할 절대적인 척도는 없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모두 각자의 때와 사정, 마음가짐에 맡겨진다. 전시를 이루기까지 참여하는 이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들, 그 끝에 탄생한 작업들이 섬처럼 전시장 이곳 저곳에 자리한다. 이것들 사이를 연결할 관객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전시를 연다. 쿨라를 시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건네는 첫 선물을 바가(vaga)라 한다. 이 전시는 당신에게 드리는 바가다. 관객인 당신의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을까. 전시를 보는 지금, 혹은 그 언젠가 당신의 알맞은 때에. 이러한 생각 끝에, 이 전시의 제목을 “쿨라 링: 이야기 군도”라 지었다.
글. 우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