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시는 비유컨대, 떠오름(floating)에 관한 것이다. 떠 있다는 것은 가라앉으려는 무게에 대한 반작용으로, 올라가려는 힘에 의해 지탱된다. 이 힘은, 상승과 하강, 유영과 침몰, 돌아봄과 직진을 목전에 둔, 아직 어쩔 줄 모르는 것들 사이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떠 있다는 것은 반쯤 잠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위아래로 팽팽하게 잡아 당겨진 떠 있는 것은, 단단한 토대를 잃고 너울처럼 요동치는, 지금 이 세계 속 개인들의 아슬아슬한 모습과 닮아있다. 한국 사회를 완강하게 지배하던 제도나 관습, 혹은 생애주기와 같은 규범들이 약화되면서, 개인들은 부유하는 느낌을 받는다. 기존 트랙에 닥친 위기는 오히려 이를 수호하기 위한 움직임을 추동시키지만, 동시에 거기서 이탈한 개인들은 (표류하지 않으려는)주관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갖기도 한다.
이 전시의 참여 작품들 역시 고정된 형태를 지니지 않고 유동적인 경계를 이루면서 마주한다. 그렇게 전시는 한 공간에 놓인 서로 다른 물성들(회화와 설치, 무빙이미지와 사운드)의 상호작용에서 비롯한, 찰나의 감각을 섬세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 유동적인 상태는, 오늘날 미술가와 작품의 존재 방식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개인이 처한 보편적인 현실을 지시하며, 전시의 질문을 끌어낸다. 너(나)의 부력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등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위를 떠다니며 서로에게 보내는 여기라는 신호는, 만남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그 속에서 끝끝내 건져 올리고 싶은, 어떤 의지의 표징이다.닿을 듯 말듯, 보일 듯 말듯 돌아설 듯 말듯한 그 찰나의 가능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쏘아 올린 불분명한 신호처럼 상존하고 있을 것이다.그것은 여기 스마트폰 화면 위로 부표처럼 떠오른 접속 (불)가능한 여러 네트워크의 신호일지도, 혹은 정박지를 잃은 누군가의 긴급한 조난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제(1979)는 삶에 대한 성찰이 통과하는 수행적인 그리기를 통해서 화면 속에 온기를 불러내 왔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인물의 순간적인 동작을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연속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개별 화면 속의 인물은 한 명이면서 동시에 여럿으로, 한국 사회 속에서 여기저기로 떠밀리는 아주 보통의 여성을 표상한다. 여기서 그녀(들)의 반쯤 비튼 자세는 외부(혹은 타자로서 관객)의 신호에 대한 양가적인 해석을 끌어낸다. 이는 누군가의 부름에 대한 응답일 수도 있고, 오히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전진하려는 의지일지도 모른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인물의 내적 갈등과 그녀의 고개 앞뒤에 존재하는 현실은 관객의 위치와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